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장군에 대한 유명한 전투는 한국사회에서 영화로도 개봉이 된적이 있기 때문에 한번쯤은 홍범도 장군과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흉상이전 논란등 여러가지 이슈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홍범도 장군은 누구이며 현재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내용을 정리해서 안내해 드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장군의 인생
홍범도 장군은 1968년 8월 27일 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셨으며 당시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각종 노동과 장사등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난 시기 즉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독립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벌이고 있었고 홍범도 장군은 의병을 이끌며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노력 덕분에 의병은 큰 성과를 이뤘습니다.
1907년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한국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그 때 홍범도 장군은 함경남도 갑산 일대에서 포수들을 모으며 약 600~700명의 의병대를 이끌었습니다. 함경도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중국의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아들과 부인등을 잃기도 하는등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겪기도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체력과 사격 능력을 보유하였으며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여러가지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과 협력하여 유격전을 벌이며 함경북도등 여러 차례 지역에서 전쟁을 하며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19년에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어 대한북로군독부에서 북로 제1군 사령부장으로 선출된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활약하며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가장 큰 업적은 아무래도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과 함께 활약하면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며 이것은 현재 한국 영화로도 제작되며 역사 교과서등에서 자주 회자되는 전투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가 있고 바로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서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현재도 대한민국의 다양한 영화와 문학 역사책등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이 부분으로 흉상이전등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과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주를 명령하였고 이때에 많은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이 과정에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여기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죽기 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죽기 전까지 전쟁의 종식과 광복을 보지는 못한채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여러 우여곡절끝에 2021년 8월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의 유해송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유해는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 논란정리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인지와 더불어서 당에 입당한 사실 그리고 자유시 참변등에 대한 논란이 한국사회에서 뜨겁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논란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현재 이 가입사실로 인하여 그의 흉상이 이전되는 논란이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반대하는 의견들이 상당히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현재 여당내에서도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좌파 우파 공산주의등 이념적인 세력이나 사상보다는 미국 또한 소련과 힘을 합쳐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시기였습니다. 홍범도 장군 또한 가장 큰 목적이 조국의 독립이였기 때문에 특정한 이념적 사고를 가지고 공산주의당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소련과 함께 힙을 합쳐야 했던 상황이였으며, 따라서 당시 소련당에 가입한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당시에는 공산주의등의 이념적인 부분이 크지가 않았고 독립을 위해서 하나로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해해야하며 단순히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흉상을 이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들이 역사학자와 사회곳곳에서 나오고 힘을 얻으면서 흉상이전 이슈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과 관련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논쟁 또한 역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당시 일본에 저항하기 위하여 소련과 힘을 합치는 중이였고 소련에서는 본국으로 이동하여 식량과 무기등을 얻고 다시 조직을 재정비하여 일본에 맞서라는 제시를 독립군에게 하게 됩니다. 이에 응한 독립군은 소련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혹시모를 반란등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장을 해제하라는 소련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장을 해제할 수 없다는 파와 무장을 잠시 해제하자는 파로 분리가 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 두파는 이르쿠츠크파 그리고 상해파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처음에는 무장을 해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였지만 이후에는 소련의 요청에 응하고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요청대로 무장을 해제하자는 파로 의견을 변경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장해제를 하지 않은 파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 하여 공격을 받게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입니다. 수백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떠도는 이야기와 달리 당시 36명의 사망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과 부대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이러한 참변이 발생하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 장군은 당시의 상황을 전해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기록만이 현재까지의 남아있는 확인된 기록이며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담하여 사살을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자유시 참변 가담여부 또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해야 한다는 것에 하나의 사유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지금까지 홍범도 장군에 대한 논란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포스팅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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